EST · MMXXVI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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EP04 · 숫자

0 — 없음을 적는 법

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호로 적기까지 인류는 수천 년이 걸렸다. 그리고 그 기호가 수학을 바꿨다.

없는 것을 어떻게 적는가

수는 세기 위해 생겼다. 양 세 마리, 항아리 다섯 개. 그런데 양이 없을 때 무엇을 적는가? 적을 것이 없다. 그래서 오랫동안 0은 적히지 않았다.

문제는 자리값이 생기면서 터졌다. 자리로 크기를 구분하는 순간, 빈 자리를 표시하지 않으면 203과 23을 구분할 수 없다.

첫 번째 0 — 빈칸을 메우는 표시

바빌로니아는 기원전 3세기경 빈 자리에 쐐기 두 개를 비스듬히 찍어 표시했다. 하지만 이 기호는 자리 사이에만 쓰였다. 수의 끝에는 쓰지 않았다. 그래서 60과 3600을 문맥으로 구분해야 했다.

마야도 독립적으로 0을 만들었다. 조개 껍데기 모양의 기호였고, 자리값 표기에서 제 몫을 했다. 그러나 마야의 수학은 대륙을 건너오지 못했다.

이 단계의 0은 기호이지 수가 아니다. 빈 자리를 가리키는 표시일 뿐, 그것을 더하거나 곱할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.

두 번째 0 — 수가 된 0

전환은 인도에서 일어났다. 브라흐미 숫자에서 자란 표기 체계에서, 0은 점(śūnya, 비어 있음)으로 적혔고 — 결정적으로 — 연산의 대상이 됐다.

628년 브라마굽타는 0을 다루는 규칙을 썼다. 어떤 수에서 그 자신을 빼면 0이다. 0을 더해도 수는 변하지 않는다. 0에 어떤 수를 곱해도 0이다. 그는 0으로 나누는 것까지 시도했다가 실패했는데, 실패한 것 자체가 0을 수로 취급했다는 증거다.

이 순간 0은 '없음의 표시'에서 **'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하나의 수'**로 승격했다.

서쪽으로 가는 길

힌두-아라비아 숫자는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갔다. 산스크리트 śūnya가 아랍어 ṣifr가 되고, 라틴어 zephirum을 거쳐 zero가 됐다. cipher(암호)도 같은 뿌리다 — 알 수 없는 기호라는 뜻이 남은 것이다.

유럽은 순순히 받지 않았다. 로마 숫자로 셈하던 회계 관행이 깊었고, 0을 포함한 새 숫자는 위조하기 쉽다는 이유로 1299년 피렌체에서 금지되기까지 했다. 0 하나가 붙으면 금액이 열 배가 되기 때문이다.

그럼에도 산법(algorism)이 이겼다. 주판 없이 종이 위에서 곱셈과 나눗셈이 되는 체계를 이길 수 없었다.

남은 것

0이 없으면 10진법의 자리값이 작동하지 않는다. 자리값이 없으면 필산이 없고, 필산이 없으면 대수도 미적분도 없다.

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하나의 수로 인정하는 일 — 이 한 걸음이 그 뒤의 모든 계산을 떠받치고 있다.

SRC근거9

이 이야기가 딛고 선 아카이브 항목들. 각 항목에 출처가 달려 있다.

0(영) 06280근사
위치기수법BCE 2000positional weighting of digits확정
바빌로니아 숫자 𒐕BCE 200060진 위치기수법 (sexagesimal)근사
브라흐미 숫자BCE 30010진 기호 (비위치 초기 단계)근사
인도-아라비아 숫자 0–9500base-10 위치기수법 (positional decimal)근사
시프르(ṣifr) — 'zero'의 어원825śūnya → ṣifr → zephirum → zero/cipher근사
알고리즘·산법(algorism)82510진 필산법 (Hindu numerals)근사
로마 숫자 VIIBCE 500가법·감법 표기, 0 없음근사
10진법 base 10255 in base 10확정